2020.11.No.9

오리 전택부 선생님 선집

내가 청년이 되어야지

오리 전택부 선생의 인물평전 중에서 '월남 이상재 선생'의 이야기를 발췌하였습니다.

출처: 강아지의 항변 (오리 전택부 저)

 

 제100회 전국체전의 출발점이 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1920년) 모습.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애국지사 월남 이상재 선생이 시구를 하고 있다. /서울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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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은 청년들과 씨름도 하고 뜀박질도 했다. 회관 안에서는 청년들과 장기도 많이 두었다. 한번은 청년들과 장기를 두다가 그가 지게 되었다. 청년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선생님! 이제는 지셨지요!"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장기판을 들여다보며 "지긴 왜 져! 두게!" 했다. 드디어 상대방 청년은 궁을 먹어 버렸다. 그제야 월남은 졌다고 선언했다. 무엇이든 낙심 말고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는 무언의 교훈이었다.

월남은 정말 꾸밈없는 한국 사람이었다. 입는 옷에도 전혀 무관심했다. 언제나 풍뎅이 위에 중산모를 쓰고 긴 지팡이를 들고 다녔다. 어느 날 청년회관에서 한 청년이 그의 몸차림이 하도 우습게 보여서 "선생님, 중사모 밑에는 풍뎅이를 쓰는 법인가요?" 했다. 그러자 그는 "이놈아, 그럼 중산모 위에다 풍뎅이를 쓰랴? 하여 웃음을 떠뜨리게 했던 것이다. 이렇게 청년들과 실없이 노는 것을 본 한 노인 친구가 월남을 나무랐다.

"여보게, 젊은 사람들하고 너무 상없이 굴면 버릇이 나빠지지 않겠나!"

월남은 대답했다.

"여보게, 그럼 내가 청년이 되어야지 청년들더러 노인이 되라고 해서야 되겠나?

내가 청년이 되어야 청년이 청년노릇을 하는 것일세!"

이와같이 그는 언제나 청년의 친구였으며, 자신이 바로 청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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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럭이 희올수록

마음 더욱 푸르신 님

젊음의 구원조선

품에 찾아 드오실 제

앞녁 봄 끝없는 길에

꽃이 한참 붉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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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당 최남선이 월남이 간 후 그를 그리며 쓴 추모서의 한 구절이다. 그는 '백발청년'이요, '만년청년'이요, '구원의 청년'이었다. YMCA 지도자로있으면서도 언제나 청소년들과 같이 살고 같이 즐기고, 같이 생각하며 지냈다. 그는 청년들을 위하여 청년들과 함께 "조선 청년이여!"를 부르짖었다.

YMCA 기관지 <청년>에는 첫머리에 "조선 청년이여"라는 표제의 글이 실렸는데, 그것은 월남이 연속으로 쓰는 부르짖음이었다. 짤막한 글이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박력 있는 글이다. 소박한 형태의 문장이지만 속뜻은 깊고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내용의 문장이다. 애국애족하자는 열렬한 부르짖음이다. 그래서 그가 쓰는 글은 일본 형상에게 늘 검열을 받아서 새까맣게 지워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월남은 1908년 59세 되는 해에 YMCA 종교부 간사로 들어간 후 세상을 떠나기까지 약 20년간 YMCA에서 지냈다. YMCA 총무도 아닌 평간사로서 청년들의 정신교육, 인격함양, 건전한 사상교육을 위하여 강연으로 혹은 성경공부를 통해 유머를 하며 체육관과 로비와 교실에서 청년들을 만났다.

YMCA가 한국의 각종 체육분야에 공헌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이 체육을 일으킨 지도자가 곧 월남이다. 그 실례로 1909년 유도부가 생긴 때의 일이다. 그는 유도부 신설을 역설하면서 "여기서 장사 백 명만 양성하라" 했던 것이다. 장사라 하면 그 때 일본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존재였다. 그렇지만 청년의 기운을 돋우고 열의를 북돋우기 위하여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 월남의 생각이었다. 이 말이 동기가 되어 YMCA에서는 무수한 장사와 의기남아들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다음은 월남이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날 이야기다. 평소 그를 극진히 따르던 YMCA의 구자운과 변영로가 월남의 자비스런 얼굴을 한 번 더 보기위해 제동 댁으로 문병을 갔다.

일개 야인으로 평생을 청빈하게 지낸 월남 댁은 그날따라 더 쓸쓸하게 보였다. 방에 들어가니 월남은 잠이 들었던지 혼미한 가운데 누워있었다. 그는 인기척을 듣고 희미한 눈을 떠 두 청년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대번 한다는 말이 걸작이었다.

"이놈 자식들, 너 나 뒈졌나 안 뒈졌나 보러 왔지?"

말 그래도 "내가 죽었다 안 죽었나 보러 왔느냐?"는 뜻인데, 평소 이 두 청년들과는 농을 하던 처지로 실상은 문명을 와서 고맙다는 말이었다. 이와 같이 월남은 임종 직전까지 청년들과 농을 하며 지냈다.

그는 이 말을 하고는 벽 쪽을 향해 돌아누우면서 뜨거운 눈물을 두 볼에 주루루 흘리는 것이었다. 80평생 고난의 가시덤불 속을 걸어가면서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던 이 야인이 사랑하는 두 청년을 보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린 것이다.

이튿날인 1927년 3월 27일, 월남은 78세를 일기로 영영 세상을 떠났다. 이 비보가 세상에 전해지자 전국 각지에서 애도의 물결이 일었다. 드디어 월남의 유해를 사회장으로 모시기로 결정했다. 악독한 일제도 이 결정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사상 처음 보는, 어는 국장보다 성대한 사회장이었다.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10만 군중이 참집했다고 하였고, 좌익 단체까지 포함하여 정식으로 참여한 단체가 무려 스물아홉 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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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외국 사람들이 말하는 그의 인물평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세브란스 병원 원장이던 에비슨 박사도 추도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상재의 이름은 'Grand Man of Korea'로 아는바, 이는 조선의 거인이요, 노인이란 뜻이올시다."

게인 박사는 <한국 선교50년 기념 논문집>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일본 경찰은 조선의 유명한 사람은 죄다 조사해서 비밀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이상재 씨는 조선 사람 중에서 제일 훌륭한 인물인데도 외모는 산도적처럼 생겼다."

사실 월남은 위대한 야인이며 거인이었다. 대인이며 노인이었다. 태산같이 무겁고 준령같이 험상스러운 인물이었다. 그는 독실한 예수교 신자면서 단군 신앙도 좋아하고 노자와 석가의 신앙도 좋아하는 세계인이었다. 그의 가슴속에는 거센 광풍이 설레는가 하면 온화한 춘풍도 풍겨졌으며, 자비와 신앙과 애정이 사무쳐 있는 성자인가 하면 금시 죄인을 벌할 것 같은, 무섭고 두려운 위엄이 있는 인물이었다.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선생

약력

1850 충남 한산에서 출생

1867년 상경하여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 박정양과 알게됨.

1881년 박정양을 따라 일본 시찰

1887년 주미공사관 1등서기관이 됨.

1894년 승정원 우부승지가 됨.

1896년 의정부 총무국장. 독립협회에 가입

1902년 개혁당 혐의로 체포되고 감옥에서 기독교 신자가 됨.

1908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종교부 총무가 됨.

1922년 만국기독교청년회 연합대회 참석

1824년 조선일보 사장이 됨.

1927년 신간회 초대 회장이 됨.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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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오리 '전택부'>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한글 사랑


전택부 선생은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한글 사랑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그의 좌우명은“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태복음 6장 33절)는 말씀이었다.‘먼저 하나님의 나라의 의를 구하는 것’이 삶의 목적인 그에게 하나님 사랑은 곧 나라 사랑이었다.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그는 일찍이 YMCA 운동에 힘썼고, 겨레의 혼이 담긴 자랑스런 유산 한글이 제대로 쓰이고 그 위격(位格)에 걸맞은 위상을 확립케 하고자 애썼다. 한글날 국경일 제정 운동에도 전념했다. 1926년 제1회‘가갸날’로 제정된 한글날은 1991년 ‘법정공휴일이 아닌 기념일’로 바뀌었고, 2006에는 ‘법정공휴일이 아닌 국경일’로 정해졌다가 2013년에야 온전한 국경일(법정공휴일)로 재지정되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한글날 국경일 지정 문제로 청와대에서 대통령 접견이 예정되었던 전택부 선생은 뜻하지 않게 일정이 무산되면서 그 충격으로 뇌출혈로 쓰러졌고, 이후 투병하는 가운데서도 한글날이 제 위치를 찾기 위해 무던히 애쓰다 소천했다. 

전택부(全澤鳧, 1915∼2008)
호는 오리(吾里). 함경남도 문천 출생. 1940년 도쿄 일본신학교 예과를 졸업하고 1941년 같은 신학교 본과를 중퇴했다. 〈월간 새벗〉과 〈사상계〉의 주간을 지냈으며, 소천 아동문학상 운영위원장, 서울 YMCA 총무 및 명예총무, 한글전용국민실천회 회장, 한글인터넷추진 총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58년 이후 〈한국 기독교회사 만필〉, 〈토박이 신앙산맥〉, 〈양화진 외인 열전〉 등을 신문에 연재하면서 사건 현장을 중심으로 한 교회사 연구에 정진했고, 한국 기독교의 수용과 성장을 토박이 신앙인의 신앙역사로 보려는 ‘토박이 사관’을 새롭게 시도했다. 한글 운동을 한 공로로 1978년 문교부 장관 표창, 1980년 외솔상을 수상했다.

By 청놀연View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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