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No.21

자원봉사스토리

[베트남] 조현진 단원의 자원봉사활동스토리

그들과 함께 , 그들의 속에서

 

조현진 단원

 

학생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어느덧 1년이 지났다. 서로 어색했던 시간 속에서 학생들, 이웃들, 직원들의 웃음 하나하나가 나의 가슴과 머리에 남았고, 그 사람들의 가슴과 머리에도 나와의 추억이 남았겠지.

하노이에서 교환학생으로 약 2년간 살며 나름 베트남에 대해서 파악했다고 생각했지만 월드 프렌즈 NGO 단원으로 파견되어 만난 베트남은 또 다르게 다가왔다. 특히 호치민, 그것도 12군에 도착하여 생활하다 보니 내가 알던 베트남은 마치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듯 이제야 진짜 베트남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하노이에서는 학교에 다녔고 발달한 곳에 살았지만 월드 프렌즈 단원의 신분으로 국제개발을 목적으로 베트남에 오니 그 민낯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알던 베트남은 생각보다 많이 발전한 살기 편한 곳이었다면, 이곳에서 만난 베트남은 발전한 세상에서 소외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었다. 하루에 수많은 오토바이를 세차하고 고작 만 원 정도를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무거운 수레를 끌고 다니며 그 안에 있는 물건을 모두 팔아야 집에 돌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아버지가 아프다며 자신이 생계를 이어나가야 한다고 꿈을 포기하고 생업에 뛰어든 사람들. 자녀를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더운 날씨에도 뜨거운 불 앞에서 온종일 밥을 지어 파는 사람들. 그런데도 자신들은 괜찮다며, 행복하다며 순수하게 웃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베트남이 진짜 베트남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베트남이 다가 아니라는 걸 깨닫자 앞으로 내가 가르쳐야 할 학생들에게 어떻게 다가가고, 어떻게 그 속으로 스며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먼저 이곳에 적응하기 전에는 이 고민에 대한 답을 찾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빨리 적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어려운 일이 많았다.

                                     ▲ 발달한 1군(좌) 내가 생활하는 12군(우)의 거리


가장 힘들었던 것은 벌레였다. 하노이에서도 종종 봐왔던 벌레였지만 그것을 가장 안전하다고 느껴야 할 집에서 만나 같이 살 게 되니 정말 막막했다. 도착한 첫날 내 방 내 침대에 누워 도착한 소감을 친구와 전화하며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쓱~ 소리가 들려 가방이 떨어졌나하고 몸을 일으키던 찰나에 눈을 마주쳐버린 문 위의 바퀴벌레. 쓱 하던 소리는 바퀴벌레가 살짝 열려있던 문틈을 지나는 소리였고 우리 둘은 서로 마주쳐버린 눈에 얼어버렸다. 문 위에 있는 벌레를 보며 어떻게 나가지 고민하고 있는데 그 벌레도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었는지 내 머리 위로 날아오는 거였다. 내 쪽으로 날아오는 것을 보고 더는 고민할 필요 없이 으악! 소리를 지르며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문밖으로 뛰어나가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 손바닥만한 바퀴벌레와 더는 같이 있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는지 뛰쳐나온 내 손에는 핸드폰과 열쇠, 겉옷이 있었다. 그 길로 바로 일 층으로 내려가 경비아저씨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내 연락에 걱정되어 나온 같이 파견된 선생님과 경비아저씨와 집으로 올라갔다. 다시 올라간 집에 바퀴벌레는 보이지 않았고, 아직 짐을 풀지 않아 그대로인 캐리어들을 잠그고 몇 가지 옷만 챙겨 같이 파견된 선생님 집으로 피신했다. 그 다음날 바로 청소하는 사람들을 불러 대청소를 하고 틈이란 틈은 모두 막은 후 비로소 나의 호치민 생활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내가 정말 감동이었던 것은 더 묻지도 않고 같이 올라가 벌레를 찾아주던 경비아저씨와 나보다 더 벌레를 무서워함에도 바로 달려 와준 선생님이었다. 시작부터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했다. 그 뒤로도 선생님과 나는 집에서 크고 작은 벌레들이 나오면 서로의 집을 오가며 좌절했다가 다시 이겨보겠다며 의기투합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벌레가 나오면 스스로 죽일 수도 있고 도움을 청할 이웃도 생기고, 벌레의 이름도 지어줄 정도로 적응했다.

이런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소중한 인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적응도 하기 전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주 업무인 수업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파악하기 위해 질문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생활적인 부분에서도 혼자 해결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직원들의 도움이 필요했고 직원들은 자신의 일이 바쁨에도 불구하고 세심하게 챙겨주었다. 한 번은 내가 발을 다쳐 현지 응급실을 간 적이 있다. 너무 아파 베트남어도 영어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진료가 더뎌졌고 그때 떠오른 사람이 우리 센터의 직원이었다. 메시지로 시간이 되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전화를 걸었고 그 직원은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통역은 물론이고, 아침이 밝아오는데도 계속 나에게 연락을 하며 상태를 살펴주었다. 또한, 경황이 없어 보험청구에 필요한 서류를 챙기지 못해 청구를 포기하고 있었는데 직원들이 직접 병원에 전화해 보험청구에 필요한 서류를 이메일로 모두 받아주었다. 직원들은 지금까지도 크고 작은 도움들을 주고 있으며 파견 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준 인연들이 되었다.

다음으로 소중한 인연은 같이 호치민에 파견 온 단원들이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서로 다른 업무를 하는 우리들이지만 서로에게 참 많은 힘이 되어 줬다. 국내 교육을 받을 때부터 룸메이트라 오랜 친구 같은 단원도 있고, 한국어 교육이 처음인 나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던 단원도 있고, 호치민에 와서 알게 되었지만 종종 만나 내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준 연장 단원도 있고, 같은 기관에 파견되어 날마다 만나며 정말 많이 의지하고 힘이 되어 준 단원도 있다. 우리는 주말만 되기를 기다렸다가 주말에 만나 끝이 없는 수다를 떨고 먹고 싶었던 음식을 하루에 몰아 먹기도 하며 우리만의 주말을 보냈다. 수다의 주제는 굉장히 다양했고 제일 많이 했던 이야기는 행복에 관한 이야기였다. 행복이 무엇일까로 시작했던 우리의 이야기는 파견종료 시점이 되어서야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가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큰 행복이 가끔 찾아오는 것보다 작은 행복이 일상에서 꾸준히 이어져야 하며, 우리가 그 행복을 행복으로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베트남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그 사람들의 생각, 가치관, 생활을 보고 배우며 얻은 또 하나의 인생이다.

같은 기관에 파견된 단원과는 호치민에서 정말 뗄 수 없는 가족과 같은 관계가 되었다. 매일 같이 출근해 옆자리에서 일하고 같이 퇴근하며 하루의 반 이상을 붙어있었음에도 퇴근하고 서로의 집을 오가며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고 그러다 시간이 늦으면 같이 자기도 했다. 그것도 모자라 주말도 같이 보내고, 쉬는 날이면 함께 여행도 다녔다. 크고 작은 일들을 함께 이겨내고 극복해내면서 서로가 끈끈해졌지만 나이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렇게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우리의 대화는 의식의 흐름대로 이어지지만, 시작과 끝은 항상 학생들이다. 서로 수업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말해주며 웃기도 하고, 괜찮은 수업 방법이 있으면 공유하기도 하고, 서로에 대한 고민, 학생에 대한 고민, 학생들의 고민에 관해 이야기하며 같이 해답을 찾아갔다. 이렇게 가까이에 내 고민을 쉽게 털어놓고 들어주며 같은 마음으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정말 다행이고 감사하다.

마지막으로 소중한 인연은 베트남 생활의 8할이 되었던 우리 학생들이다. 베트남 생활에 적응하기도 전에 만나 어리숙하고 부족했던 선생님과 같이 성장해간 고마운 학생들. 초급반 담당이었던 나는, 자음과 모음을 비롯해 가나다라부터 가르쳤다. 3월에 제일 처음 만났던 학생들은 나에게 가나다라를 배워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해지자 내 손을 떠나 중급반으로 갔다. 이 학생들은 지금 한국어로 농담이 가능할 정도로 유창해졌고 아직도 사랑한다는 말을 인사로 착각하는 듯 애교 섞인 메시지를 나에게 보내며 애정을 표한다. 지금 내가 마지막으로 맡게 된 우리 초급반은 아직 베트남어를 조금 허용해야 원활한 수업이 되지만 처음과 비교해서 많이 발전했다. 나를 만날 때마다 짧은 한국어로 자신들에게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것을 듣다 보면 어느새 내가 시험을 보고 있는 것인가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리송해지지만, 조금이라도 말을 더하려는 노력이 보여 마냥 예쁘게 느껴진다. 첫정이 무섭다고 처음 만났던 학생들에게 줬던 애정과 관심을 지금의 초급반 학생들에게도 똑같이 줄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었지만, 또 다른 인연으로 다가오는 학생들에게 순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왜 이것을 외우지 않았는지, 이것을 왜 아직 틀리는지’와 같은 잔소리들이 듣기 싫을 법도 한데 잔소리에도 배시시 웃으며 ‘천사 선생님, 죄송해요. 공부할게요.’ 하며 능글맞게 넘어가는 학생들의 표정을 보면 나도 더는 화내지 못하고 같이 웃어버렸다. 또 서툰 한국어로 한 글자씩 눌러쓴 편지를 받을 때마다 그 안에 담긴 나에 대한 애정, 자신들의 이야기, 농담 등을 보며 이 학생들에게 순서를 따졌던 내가 미안해졌다. 식당을 가도, 길을 걸을 때도 항상 선생님들을 위해주던 우리 학생들. 분명 우리가 적은 나이가 아닌데도 학생들과 함께 할 때면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우리를 하나하나 챙겨줬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보여줬던 진심이 닿았고, 학생들의 진심도 우리에게 닿았기 때문에 서로를 위하며 1년을 지냈고, 싫은 소리를 해도 웃으며 받아들이고 고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 직원들과 함께 동나이 나들이에서(좌), 쉬는 시간 수줍게 커피와 쪽지를 내밀던 12군 학교 학생들(우)


학생들과 보낸 시간이 많았던 만큼 울고 웃었던 추억들이 많다. 이렇게 학생들과 고군분투하다 보니 어느새 파견을 마치는 시점이다. 자세히 쓰지는 않았지만, 베트남 복권이 신기해 쳐다보던 내게 선뜻 복권을 선물해주던 지나가던 아저씨, 멀리서 얼굴을 보이면 내가 좋아하는 반미를 벌써 준비하고 웃으며 건네주시던 빵집 아주머니, 할인하는 날을 어김없이 알려주시던 단골가게 사장님, 커피숍에 앉아 있으면 어느새 한국 노래를 틀어주며 씩 웃던 카페 직원, 물건을 못 찾고 두리번거리면 슬그머니 나타나 뭐가 필요하냐고 묻고 다음 날 준비해주시던 마트 아주머니, 1층에서 놀다가 내가 지나가면 서로 “한국 사람이야” 속삭이며 조용히 다가와 어눌한 발음으로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던 동네 아이들,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되었고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연락하라며 항상 밝은 웃음을 지어주던 이웃 언니, 밤늦게 퇴근하는 나에게 이제 오느냐고 밥은 먹었냐고 따뜻하게 물어주던 옆집 아주머니까지. 나는 어느새 그들의 삶 속 구성원이 되어 있었고 아무도 없었던 이곳에서 나도 나의 사람들, 나의 공간을 만들어 갔다. 적응하려고 애썼던 나의 노력이 무상하게도 적응은 나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마음을 열고 바라보고 다가가야 하는 것은 맞지만 시간을 가지고 조급해하지 않으면 조용히,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 나를 번쩍 들며 1등을 다짐했던 체육대회(위), 나의 깜짝 생일 파티를 준비해준 고마운 학생들(아래)


국내 교육을 받으며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이 바로 ‘무언가 하려 하지 말고 그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우리가 무언가 하려고 가는 건데 왜 하지 말라는 거지? 그리고 이미 외국인이고 그들에게는 이방인인데 어떻게 하나로 녹아든다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항상 마음에 새기고 그들의 시선에서,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다 보니 이제는 그 뜻을 알 것 같다. 국제개발의 정의에 대해서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들에게 녹아드는 법과, 국제개발이 필요한 이유와 현장이 힘들지만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는 확실히 배워간다. 또한, 내가 1년 동안 느꼈던 감정, 사람들과의 관계, 경험은 살아가면서 밑거름이 되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 믿는다.

     ▲ 웃음이 가득했던 수료식

By 한국국제봉사기구View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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